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고르바초프 (문단 편집) === 정치 ===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 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다.'''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미국]]이 [[2001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거라고 미국에 누차 경고했다. 당시엔 모두 무시했지만 지금 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가까스로 화해 했다. 또한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한다.[* 공산주의권 전체의 이익이 개별 국가의 주권보다 중요하므로 특정 국가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독자행동을 한다면, 무력 개입도 정당하다는 주장.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을 바르샤바 조약군이 [[탱크]]로 깔아뭉개면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브레즈네프]] 당시 서기장이 선언했다. 즉, 이는 [[중부유럽]] 공산권이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독트린이다.] 고르바초프의 비간섭 노선은 [[1989년 동유럽 혁명]] 및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미소간 긴장 완화로 인해 전세계적인 민주화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한국]],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 및 남미 국가들에서 [[군사독재]]가 끝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1989년 12월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와 [[몰타 회담|정상회담]]을 가지면서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 오는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40여년 이상 이어오던 공포, 대립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 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정치인으로써 고르바초프가 세운 세계적 공로가 하나 더 있다면 집권 중이던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당시 고르바초프는 소련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던 사고 특성 상 사고지역의 정보를 통제했지만, 동시에 재난수습 작업을 현장에서 지휘한 보리스 셰르비나(Борис Щербина)와 [[발레리 레가소프]](Валерий Легасов) 등 현장 실무자의 의견을 적극 경청하면서 필요한 자원을 최대한 지원했다. 체르노빌 사고 당시 소련 전역에서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건 고르바초프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와 북극해안의 핵 폐기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한 점이다. 비슷한 사례로 1957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 첼랴빈스크-40에서 약 800㎢ 정도 면적의 땅에 7,600㎥ 규모의 방사능 폐기물이 쏟아진 [[키시팀 사고]]로 인해 우랄 강이 [[삼도천]]으로 변하자, 당시 소련 정부는 24개 마을을 [[불도저]]로 쓸어버리고 거주민 1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을 때는 정보 통제로 철저히 묻었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 사고 처리 과정에서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고 보다 더 급진적으로 소련 사회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르바초프는 정치인으로써 수많은 공로를 세웠지만, 동시에 정치인으로써 수많은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우선 고르바초프는 선출 때부터 소련 정부 내 주요 권력기관에 대한 지도력이 확고하지 못했던 점이 가장 큰 태생적 약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85년 3월 서기장에 선출될 당시 브레즈네프 시절 [[KGB]] 의장이자 브레즈네프 사후 서기장으로 취임했던 [[유리 안드로포프]]으로부터 주목을 받아 당지도부에 진입한 신진인사였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할 고르바초프가 속한 19명 정원의 제27기 당정치국에서도 나이순으로 막내였다.[* 고르바초프보다 어린 사람은 유리 마슬류코프(1937-2010) 뿐이었다.] 명목상이라도 집단지도체제의 도구였던 당정치국에서 여러모로 고르바초프보다 경력도 많고, 오랜 세월에 걸쳐 입지를 쌓은 다른 정치국원들을 고려한다면 고르바초프의 정치력은 기존 원로에 비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개혁에 대한 당시 소련 정치인들 사이 입장 차이도 결국 고르바초프와 동맹격이었던 정치인들을 하나둘씩 떠나게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 대표 정치인이었던 [[니콜라이 리즈코프]]는 초창기 고르바초프와 협력 관계였으나, 이후 고르바초프와 개혁 진행 방향을 두고 갈등을 빚으며 보다 보수적인 접근을 강조하여 고르바초프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보리스 옐친 등 급진개혁파의 의견을 들어준다고 생각한 리즈코프는 고르바초프를 떠났다. 이후 시네트라 독트린을 발표한 외무장관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나 고르바초프의 주요 조언가였던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 등, 고르바초프는 급진개혁파나 개혁파, 온건보수파나 강경보수파 등 여러 세력 사이에서 어느 한 세력을 편들수록 점차 주위에 있는 우군을 잃어갔다. 고르바초프는 집단지도체제인 당정치국 제도의 문제점을 깨닫고 1980년대 말 대통령제를 신설해서 소련 대통령 자리에 오르지만, 이 때는 오히려 소련 공산당을 탈당한 [[보리스 옐친]] 등 급진개혁파 출신 정치인들로부터 반대에 직면하면서 사실상 정국에 대한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된다. [[글라스노스트]]로 확대된 언론의 자유는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체제 개선보다는 그동안 억눌려 있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창구로 기능하면서 소련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민주화와 선거를 일부 허용하더라도 독립 민족주의가 있는 공화국들에 대하여 광범위한 [[지방자치]]를 허용한 것은 실수였다. 실제로 고르바초프의 지방선거와 지방자치 허용 이후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등의 공화국들에서는 독립파가 무더기로 공화국 최고회의에 진출하여 독립을 외치면서 소련 해체의 단초를 제공했고, [[중앙아시아]]와 [[캅카스]]에서도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은 지역 정치인들의 갈등으로 소수민족 폭동 사건들이 발생했다. 고르바초프가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자, 아르메니아 SSR과 아제르바이잔 SSR 최고소비에트 대표들의 갈등으로 1988년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소련 붕괴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전쟁]]이 터지고야 말았다. 이런 난맥상에 군부와 관료 등 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기득권층이 대거 반발하면서 [[8월 쿠데타]]로 이어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